120년. 몽골군에서 미군까지, 대여섯 개의 군대가 번갈아 가며 이 땅을 밟았다. 그 120년이 끝나고 이제 겨우 되찾은 땅에, 이번에는 정부가 제 손으로 콘크리트를 박겠다고 한다
120년. 몽골군에서 미군까지, 다섯 개의 군대가 번갈아 가며 이 땅을 밟았다. 그 120년, 이 땅은 이제야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아직 3분의 1도 되찾지 못한 그 땅에, 정부는 벌써 제 손으로 콘크리트를 박겠다고 한다. 서울숲 한복판에 마흔 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상상해보라. 지금 정부가 하려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무대가 서울숲이 아니라 용산일 뿐, 상상이 아니라 이미 대책 문건에 적힌 계획이다.
8월 24일, 한국조경학회가 성명을 냈다. 정부의 '8·13 부동산 대책'에 담긴 용산공원 아파트 구상을 철회하라는 내용이다. 정확히 20년 전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용산기지 공원화를 선포하며 이렇게 말했다.
"용산공원은 지금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소중한 자산입니다. …… 서울 한복판에 새로 열릴 80만 평의 녹지공원은 생각만 해도 가슴을 부풀게 만듭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은 '청년과 주택 마련'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흔드는 손은 다름 아닌 정부 자신이다. 스스로 만든 법을 스스로 고쳐서, 스스로 어기려 한다.
빈 땅이 아니다
이 땅에는 고려 말 몽골군이 병참을 두었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였다. 임오군란 뒤에는 청군이 주둔했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의 본거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는 미군이 점유했다. 을사늑약 이후 120년 만에, 이 땅은 이제야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이 땅을 마치 아무 사연 없는 빈 필지처럼 취급한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골조를 얹으려는 발상을, '공급 대책'이라는 행정 용어 뒤에 가려 놓은 것이다.
170년 전 뉴욕도 같은 갈림길에 섰다. 1850년대 맨해튼 땅값이 치솟자 개발론자들은 "저렇게 비싼 땅을 놀리는 건 낭비"라며 주택 건설을 요구했다. 뉴욕시는 그 압력에 굽히지 않고 공원을 택했다. 170년이 지난 지금, 센트럴파크가 없는 뉴욕을 상상하는 사람은 없다. 그때 뉴욕이 지금 한국 정부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우리가 아는 뉴욕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숫자로 국민을 속이지 말라
정부는 어린이정원 부지 약 30만㎡, 공원 전체의 10%에 아파트 2만 가구를 짓겠다고 밝혔다. 이 숫자를 서울 최대 단지 헬리오시티 옆에 놓아보면 셈법이 드러난다. 헬리오시티는 대지 34만 6천㎡에 35층 건물 84개동, 용적률 286%를 채워 9,510가구를 수용했다. 정부는 이보다 좁은 부지에 두 배 넘는 가구를 넣겠다면서도, 어떤 용적률과 어떤 설계로 그것이 가능한지는 밝히지 않았다. 숫자를 먼저 던져놓고 근거는 뒤로 미루는 방식이다.
한국조경학회는 다른 안도 전했다. 부지를 60만㎡로 늘리고 용적률을 1,000%까지 올리면 6만 가구가 나온다는 안이다. 그 정도 밀도라면 서울 도심의 경관도, 교통 체계도 버티지 못한다. 결국 현실적으로 지어질 물량은 5천 가구 안팎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마저도 입주는 2040년이다. 지금 정부도, 다음 정부도 임기 안에 첫 삽을 뜨지 못할 계획을, 정부는 마치 당장의 집값 대책인 것처럼 팔고 있다. 15년 뒤에나 열릴 문으로 오늘의 불안을 잠재우겠다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어음이다. 그것도 부도가 예정된 어음이다.
정부는 왜 하필 이 땅인가
서울에 빈 땅이 없어서가 아니다. 정부가 용산을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땅은 이미 국가 소유다. 사들일 필요도, 수십 명의 지주와 협상할 필요도, 강제수용을 둘러싼 소송을 감당할 필요도 없다. 행정 절차상 가장 저항이 적은 땅이라는 것, 그것이 용산이 선택된 진짜 이유다. 게다가 위치는 서울 한복판이다. '용산에 2만 가구'라는 한 줄은 다른 어떤 택지 발표보다 강한 헤드라인이 된다. 정부에게 이곳은 정치적으로 가장 값싸고, 가장 눈에 띄는 땅이다.
그러나 그 셈법은 숫자 앞에서 무너진다. 이 땅은 120년간 외국 군대가 점유한 오염 부지다. 반환율은 31.5%, 완전한 정화와 착공까지는 반환 완료 후 7년이 더 걸린다. 헬리오시티와 비교하면 실제로 지어질 물량은 정부가 말한 2만 가구가 아니라 5천 가구 안팎이다. 정치적으로는 가장 값싼 땅이, 실제로는 가장 비싼 땅인 것이다. 토양 정화 비용을 치르고, 15년을 기다리고, 국가가 20년간 지켜온 법적 약속까지 깨면서 얻는 것이 고작 5천 가구라면, 이것은 주택 정책이 아니라 계산 착오다. 아니, 계산이 틀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다른 계산 — 정치적 상징성의 계산 — 을 주택 공급의 언어로 바꿔치기한 것에 가깝다.
정부가 정말 두려운 것은 집값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이다. 그래서 협상이 필요 없고, 반대할 지주가 없고, 상징성이 큰 땅부터 집어든다. 심리적으로는 가장 쉬운 선택이지만, 정책으로는 가장 무책임한 선택이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정부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인상이 아니라, 실제로 살 수 있는 집이다. 그 두 가지는 다르다. 정부는 지금 그 둘을 의도적으로 섞고 있다.
속도가 아니라 완성
기지 반환율은 2024년 12월 기준 31.5%에 머물러 있다. 공원 완공까지는 반환 완료 시점으로부터 7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학회의 계획이다. 아직 오지 않은 그 시점을 향해, 정부는 벌써 시계를 돌리고 있다. 반환조차 끝나지 않은 땅에 착공 시점을 못 박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조급증이다.
용산공원은 남산과 한강을 잇는, 서울의 생태축이 완성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여의도보다 넓은 이 땅을 "개발하지 않은 빈 땅"이 아니라 "개발하지 않기로 한 약속의 땅"으로 지켜온 것은, 지난 20년간 여야를 넘어 이어져 온 이 도시의 합의였다. 그 합의를 임기 내 실적이 급한 정부가 주택 공급 숫자 하나로 무너뜨리려 한다. 120년을 기다려 돌아온 땅을, 5년짜리 정권이 마음대로 재단할 권리는 없다.
지금 정부에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책임이다. 아파트는 다른 곳에도 지을 수 있다. 정부가 정말 청년의 주거를 걱정한다면, 짓기 쉬운 곳이 아니라 지어야 할 곳을 찾아야 한다. 용산공원은, 여기가 아니면 없다.